[최창일 칼럼]인간은 기쁠 때 노래하지만, 가장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도 노래를 찾는다. 축제의 한복판에서 흐르는 경쾌한 리듬보다, 사위(四圍)가 고요해진 밤 홀로 듣는 처연한 선율이 우리 영혼에 더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것은 어째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로 꼽히는 곡들은 대개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상실’을 품고 있다. 에릭 클랩턴(Eric Clapton)의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이 대표적이다. 네 살 어린 아들을 아스팔트 바닥으로 떠나보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부서진 마음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잡고 "천국에서 만나면 내 이름을 기억해 주겠니"라고 읊조린 이 노래는, 개인의 사적인 참척(慘慡)의 고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곡이 전 세계인의 심장을 울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절제된 덤덤함에 있다.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가만히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그 선율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묻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를 떠올리며 함께 울었다. 한 예술가의 극진한 슬픔이 인류 보편의 위로로 승화된 순간이다.
반면, 1930년대 유럽을 뒤흔든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는 개인의 이별을 넘어 시대의 거대한 어둠을 투영한다. 대공황의 그림자와 전쟁의 전조가 드리웠던 헝가리에서 태어난 이 곡은, 듣는 이를 단숨에 무력감과 절망의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음울하게 하강하는 선율은 마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삶의 의지를 내려놓게 만드는 기묘한 흡입력을 지녔다. 당대 이 노래를 듣고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일화는, 음악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고독과 허무를 얼마나 강력하게 건드릴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서글픈 반증이기도 하다.
목소리가 배제된 기악곡에서도 슬픔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는 가사 한 줄 없이 오직 현악기들의 느린 호흡만으로 비장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냘프게 시작된 선율이 겹겹이 쌓이며 음을 고조시키다가,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정점에서 허공으로 흩어질 때, 청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서사적 슬픔을 마주한다.
존 F. 케네디의 장례식이나 9·11 테러 추모식 등 인류사적 거대 비극마다 이 곡이 흐른 것은, 인간이 거대한 운명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경외감과 슬픔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선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슬픈 음악을 들을 때, 뇌는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안정을 주는 호르몬인 ‘프로락틴(Prolactin)’과 ‘옥시토신(Oxytocin)’을 분비한다. 몸과 마음이 상처 입었을 때 이를 치유하기 위한 자가 면역 반응이 음악을 통해 유도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Catharsis)’ 역시 이 맥락과 닿아 있다. 카타르시스는 본래 ‘배설’이나 ‘정화’를 뜻하는 의학 용어였다.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 억압된 우울과 고독을 슬픈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부로 발산(배설)함으로써 오히려 정신적인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눈물은 감정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가장 순수한 해독제다. 슬픈 노래는 우리가 차마 부끄러워 숨겨두었던, 혹은 바쁜 일상에 치여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면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안전하게 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세상을 등진 천재 음악가가 남긴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채우고 있는 비워야만 하는 것일까"라는 고뇌의 고백은,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의 고독한 어깨를 토닥이는 따스한 손길이 되어 돌아온다. 슬픔이 슬픔을 만나 서로를 껴안을 때, 고독은 더 고립이 아닌 연대의 언어가 된다.
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들은 훌륭한 서사시나 한 편의 정조 높은 시(詩)와 같다. 좋은 시가 언어의 절제를 통해 독자에게 사유의 여백을 남겨두듯, 위대한 슬픈 노래들 역시 감정을 과잉되게 쏟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음과 음 사이의 빈 공간, 숨을 고르는 찰나의 침묵을 통해 청자가 자신의 삶을 대입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둔다.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그의 시에서 고통과 슬픔을 삶을 완성하는 필연적인 아름다움으로 노래했다. 어둠이 있어야 별이 빛나듯, 슬픔이라는 캔버스가 배경이 되어주어야만 비로소 인간 삶의 기쁨과 순수함이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들은 바로 그 어두운 캔버스의 역할을 한다.
결국, 가장 슬픈 노래를 소개하고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연약하고도 솔직한 모습을 환대하는 행위와 같다. 슬픔을 억누르고 외면하는 사회는 건조하고 차갑다. 반면 슬픈 선율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이의 내면에는,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는 깊은 우물(Darśana)이 파여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울어도 괜찮다고, 상실과 고독은 인간이기에 마땅히 거쳐 가야 할 아름다운 정거장이라고. 그러니 삶의 어느 길목에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거든, 도망치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선율 하나를 방 안에 틀어놓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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