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6월이면 더 깊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혹은 격동의 현대사를 지나온 세대라면 가슴 한구석을 먹먹하게 적시는 노래가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도 없고, 귀를 찢는 듯한 고음의 절창도 없다.
덤덤하게, 묵직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가락. 바로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늙은 군인의 노래>다. "나 평생소원은 자식들 잘되길 바랄 뿐 / 내 평생소원은 평화로운 나라" 이 소박하고도 처연한 노랫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흔히 이 노래를 들으면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백발이 된 노장(老將)을 떠올리기 쉽다. 이 노래의 실제 주인공은 화려한 견장을 찬 장군이 아니다.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의 가장 밑바닥에서,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고 마침내 정년을 맞이한 한 무명 상사의 이야기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노래를 만든 싱어송라이터 김민기의 군 생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0년대 초, <아침 이슬>을 만들며 청년 문화의 기수로 떠오른 김민기는 당시 정권의 엄격한 감시 대상이었다. 그는 입대 후 처음에 카투사(KATUSA)로 복무했으나, 그의 성향과 영향력을 두려워한 당국에 의해 강원도 인제·원주 일대의 전방 부대(제12보병사단) 소총수로 재배치되는 이른바 '좌천성 전적'을 겪게 된다.
그곳에서 김민기는 사단 문화선전대(문선대) 소속으로 활동하며 군인들을 위한 공연을 기획하고 노래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1976년 어느 날, 김민기가 속해 있던 부대의 한 상사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6·25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고, 서슬 퍼런 전방에서 평생을 바쳐 군 생활을 해온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다.
평생을 군대라는 조직에 바쳤지만, 퇴임을 앞둔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살림은 늘 팍팍했고, 화려한 훈장 대신 깊게 팬 얼굴의 주름살만이 그의 훈장이었다.
퇴임을 앞둔 어느 날 밤, 노 상사는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까마득한 후배이자 대학교에 다니다 온 영리한 사병 김민기에게 씁쓸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보게 김 일병, 내가 내일모레면 이 옷을 벗고 나가는데…. 평생 군대에만 있어서 사회에 나가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군대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내 마음이 어떤지 노래 하나만 만들어 줄 수 없겠나?“
거칠고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선임하사의 눈가에 비친 쓸쓸함을 본 김민기는 그날 밤, 군용 초소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펜을 들었다. 그렇게 단숨에 써 내려간 노래가 바로 <늙은 군인의 노래>다. 노래의 가장 큰 예술적 성취는 '군인'이라는 존재를 국가의 도구나 이념의 전사가 아닌,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 갖은 고초 겪으며 제 바쳤도다/포탄 속에 흐른 세월 검은 머리 바래지고 / 이름 없는 미라지 속에 청춘을 묻었네/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내 청춘’ 1절은 평생을 전방에서 보낸 군인의 회한이다. ‘
포탄 속에 흐른 세월'은 그가 겪었을 전쟁의 공포와 냉전의 긴장감을 뜻한다. 그의 검은 머리는 군 생활 속에서 하얗게 바래졌고, 그의 청춘은 '푸른 옷(군복)'에 실려 가버렸다. ‘군사령관 지내신 분 몇몇이더냐 / 계급장도 없는 이 몸 알아줄 이 없어도/내 평생 소원은 자식들 잘되길 바랄 뿐 / 내 평생 소원은 평화로운 나라’ 2절은 이 노래의 핵심이자 백미다. '군사령관 지내신 분 몇몇이더냐'라는 구절은 권력의 정점에 선 이들을 향한 냉소라기보다는, 묵묵히 밑바닥을 지킨 자의 자부심에 가깝다.
화려한 계급장도 없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그가 바란 것은 거창한 정치적 승리가 아니었다. 그저 '자식들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 이 두 가지뿐이었다. 가장 소박한 소망이 싫은 가장 위대한 애국심임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이 노래의 역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한다. 한 노병의 명예로운 퇴임을 위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이후 기묘한 운명에 휩싸이게 한다. 부대 퇴임식에서 이 노래가 처음 불렸을 때, 현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평생을 군에서 뼈가 굵은 동료 부사관들과 장교들, 그리고 사병들까지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울었다. 이 노래는 순식간에 군부대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심지어 군 사기를 진작시키는 최고의 '참된 군가'로 평가받아, 국방부 추천 음악이나 국방부장관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군의 수뇌부 역시 이 노래가 가진 진정성과 군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계급장도 없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자식들의 안녕과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청춘을 바친 세상 모든 '이름 없는 이들'의 숭고한 헌신은 세대를 넘어 우리 가슴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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