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1886년, 고흐는 파리 벼룩시장에서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사서 그림 속에 옮겼다. 정물화라고 부르기엔 너무 생생하고, 초상화라고 부르기엔 사람이 없다. 그림은 두 장르의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구두가 사람 대신 거기 있다. 발의 형태가 가죽 안에 남아 있고, 끈의 매듭은 누군가의 손버릇을 기억하고 있으며, 주름진 코끝은 수없이 굽혀졌던 발가락의 흔적이다. 부재한 인간이 사물 속에 살아 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그림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는 구두에서 "대지의 무게, 바람의 거칢, 길의 쓸쓸함, 가을 들판의 고독, 수확의 두려움"을 보았다고 썼다. 구두는 단지 묘사된 것이 아니라, 도구로서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사용되지 않는 구두가 오히려 더 깊은 진실을 말한다. 닳아 있기에 쓰였음을 알고, 구겨져 있기에 무게를 실었음을 안다.
사물은 침묵으로 말한다. 시인은 이것을 안다. 시인에게 사물은 배경이 아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물을 "보이지 않는 것의 피부"라고 불렀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 너머에, 시간이 쌓이고 감정이 스며든 내면이 있다는 것이다. 릴케의 시에서 꽃병은 그냥 꽃병이 아니고, 거울은 그냥 거울이 아니다. 사물은 인간의 삶을 흡수한 기억의 저장소다. 시인은 그것을 열어 보는 사람이다.
고흐 역시 그랬다. 그는 탄광 지대 보리나 주에서 광부들과 함께 살았고, 농민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의 눈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을 향했다. 감자를 먹는 농민의 손, 씨를 뿌리는 노인의 등, 그리고 마침내 벗어놓은 구두. 고흐에게 낡음은 결함이 아니라 증거였다. 살았다는 증거, 걸었다는 증거, 무언가를 향해 나아갔다는 증거. 그는 그 증거들을 화폭에 담았다.
시인도 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다룬다. 사물의 표면을 긁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운다. 김수영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시라고 했다. 정지용은 사물 앞에서 감각을 버렸다. 백석은 음식 이름, 지명, 집안의 물건들 속에서 사라져가는 삶의 냄새를 건져 올렸다. 그들에게 사물은 세계와의 접촉 지점이었다.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었다. 이 지점에서 시화무(詩畵舞)의 미학이 떠오른다.
시와 그림과 춤은 원래 하나였다. 고대 제의에서 언어와 형상과 몸짓은 함께 움직였다. 그 분리 이전의 통합된 감각으로 세계를 보는 것, 그것이 예술의 근원적 태도다. 고흐가 구두를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시각적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손이 기억하고, 눈이 느끼며, 가슴이 반응하는 통합된 몸의 행위다. 시인이 언어로 사물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입술이 발음하고, 귀가 울리며, 몸 전체가 공명한다. 예술이 사물을 다루는 방식에는 고유한 윤리가 있다. 사물을 소비하지 않는 것, 사물이 지닌 내력을 지우지 않는 것, 그것이 담고 있는 삶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는 것. 고흐는 낡은 구두를 아름답게 만들지 않았다. 더 낡아 보이게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응시했다. 그 응시 속에서 구두는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임무는 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도 사물 앞에서 조용해진다. 떠들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해석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사물이 입을 연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찻잔이 탁자 위에 내려앉는 진동, 낡은 구두가 마루에 놓인 각도—이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시는 그 말을 받아 적는 행위다. 그림은 그 말을 색과 선으로 옮기는 행위다.
고흐의 구두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 백 년이 지나도 그 그림 앞에 서면 발이 먼저 반응한다. 어딘가 걸어본 발이 그 구두를 알아본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개별적인 사물이 보편적인 몸의 기억에 닿을 때, 시간을 넘어 소통이 이루어진다.
시도 그렇다. 백석의 시를 읽으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북방의 겨울이 살갗에 느껴진다. 사물을 정확하게 본 시인의 언어가 독자의 감각을 직접 건드리는 것이다. 결국, 시인의 눈과 화가의 손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삶이 지나간 자리다. 화려한 것이 아니라 닳은 것, 새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 속에 삶의 본질이 숨어 있다. 고흐는 구두에서 그것을 찾았다.
시인은 언어에서 그것을 건진다. 두 행위는 본질에서 하나다. 세계를 소비하지 않고 경청하는 것, 지나침 없이 머무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오늘도 어딘가에 낡은 구두가 있다. 현관 앞에, 신발장 한쪽에, 혹은 버려진 채로. 그것을 그냥 지나치는가, 아니면 멈추는가. 그 멈춤이 시의 시작이고, 그림의 시작이며,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의 시작이다. 고흐는 낡은 구두를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물을 응시하라, 그러면 삶이 보인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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