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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불편한 진실을 싫어한다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25/08/31 [10:18]

시는 불편한 진실을 싫어한다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25/08/31 [10:18]

▲ 사진 / 팍사베이   

[최창일 칼럼] 시를 읽는 독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짧은 시구 속에서 사람들은 위로와 감동을 얻는다. 중국에서 시경(詩經)이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이나, 시를 알아야 요직에 오르는 것들이 그렇다. 시란 삶의 무게를 잠시 덜고,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인간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시는 어느 환경이나 공동체적 감수성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가 문제의 역설적 순간에 쨍그랑 부딪히는 것을 본다. 내면의 불협화음이다. 부정을 저지른 자, 사회적 신뢰를 잃은 자가 대중 앞에서 시를 인용하며 자신을 감싸려 할 때다. 그 장면은 어색하다 못해 불편하다. 왜냐하면, 시의 언어와 그들의 행위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는 본질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언어다. 반면 권력의 언어는 종종 진실을 감추려 한다. 정치인이 연설 중 시구를 인용하는 순간, 청중은 잠시 마음을 연다. 그러나 그 말이 실천과 어긋날 때, 시는 공허한 장식으로 전락한다.

 

특히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시를 들먹이며 억울함을 강조하거나 자기방어의 무기로 사용할 때, 우리는 시의 순수성이 모욕당하는 것을 본다. 시인의 언어는 삶과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린 언어인데, 그것이 권력자의 방패로 소비될 때, 언어의 진실성은 산산이 부서진다.

 

법정에 선 피고인이 “가장 어두운 밤에 달빛은 빛이 난다”“ 호수 위에 달그림자를 쫓는 사람”이라는 시구를 인용하는 장면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시적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뚜렷하지도 않다. 

 

이때 시는 본래의 무게를 잃고 위선의 소품이 된다. 거룩한 성가가 범죄자의 변명으로 오염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의 존엄은 삶과 함께할 때 빛나지만, 삶과 분리될 때 치욕으로 전락한다.

 

왜 우리는 이런 장면에서 불편함을 느낄까? 그것은 독자가 본능적으로 언어의 진실성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툰 시라도 진실한 고백에서 비롯되면 감동을 준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시구라 해도 그것이 위선과 결합하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독자는 시와 삶의 불일치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해온 시적 체험마저 훼손할 수 있음을 직감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불편함이 발생한다.

 

시의 존엄은 정직한 인간만이 지킨다. 우리는 시를 인용하는 자의 삶과 언어가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검증해야 한다. 시는 누구나 인용할 수 있지만,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와 삶이 하나 되지 않는 순간, 시는 모욕당한다.

▲ 최창일 시인     ©성남일보

따라서 우리는 부정을 저지른 자가 시를 인용할 때, 그것을 단순히 낯선 풍경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언어와 윤리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시는 함부로 소비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독자가 지킬 때, 시는 다시 살아난다.

 

시를 읽는 독자가 많아진 것은 분명 희망적인 일이다. 그러나 시를 인용하는 자의 삶이 시의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인용은 공허한 위선에 불과하다.

 

시는 살아내는 것이다. 삶과 언어가 맞닿을 때, 시는 공동체에 감동과 희망을 준다. 반대로 언어와 삶이 분리될 때, 시는 권력의 무대에서 값싼 소품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이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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