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나태주 시인은 사랑에 실연을 당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시름시름 하다, 노트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시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 나태주 시인은 살 것 같았다. 시를 쓰면서 죽을 것 같은 실연의 방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나 시인과 같은 사람은 미국에도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이다. 암스트롱은 문득, 이 세계가 참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마음의 질문에 트럼펫을 내려놓고, 한 줄 한 줄 천천히 노래한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야.”(“What a wonderful world.”) 단순한 고백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근원적인 언어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이 1967년에 발표한 노래는 베트남 전쟁, 흑백 갈등, 도시 폭동 등으로 얼룩진 미국 사회에 던져진 짧지만 묵직한 사랑의 선언이었다. 세상이 어지럽던 그 시절, 그는 외쳤다.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라고. 소박한 이미지의 성서(聖書)처럼 들린다.
거창한 단어나 비유가 없다. 푸른 나무, 붉은 장미,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인사하는 사람들,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들. 삶의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것들이다. 암스트롱은 그 일상의 조각들을 노래 속에 기도처럼 쌓아 올린다. ‘예쁘다’라고 하지 않는다. “Wonderful(경이로운)”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이 여전히 경이롭다는 믿음. 그것은 단지 감상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믿음의 언어요, 회복의 시작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흑인으로 태어나 인종차별과 가난 속에서 자랐다. 거리의 소년이었고, 감옥과 트럼펫 사이에서 삶을 선택해야 했던 사람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늘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다. 어떤 이들은 그 음성을 듣고 “지친 사람 같다”라고 말한다. 그 거친 숨결이 담긴 목소리로 그는 가장 따뜻한 고백을 노래한다. “나는 이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조건이 아니라 시선이라는 것을. 어떤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 그것이 예술의 질문이자, 삶의 질문이다. 재즈는 해방의 음악이다. 악보가 없고, 틀이 없다. 연주자는 즉흥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다른 연주자와 호흡하고 공간과 교감한다. 시도 그렇다. 시는 정형을 깨뜨리고, 언어의 새 숨결을 불러온다.
그런 점에서 암스트롱의 노래는 시이고, 재즈이고, 어쩌면 짧은 기도문이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한 마디, “그리고 난 말하지요, 참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세상이 혼란스럽고, 미래가 불투명하며, 인간 사이의 신뢰가 무너질 때, 우리는 다시 이 노래를 찾아 듣는다. 무너진 내면의 돌담에 이 문장을 새긴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야.” 암스트롱의 노래가 다시 회자하는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시기다. 전쟁, 테러, 기후 재앙, 고립된 인간관계…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노래는 힘을 갖는다. “경이로운 세상이다.”라는 말은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를 붙드는 저항의 문장이다. 시인은 말한다. 음악가는 말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말해야 한다.
‘이 세상은 아직도, 참 아름답다./그 아름다움은 바로 당신 안에 있다./구름 사이로 비가 내려도/당신의 마음에 꽃은 피어날 수 있습니다/누군가를 향한 인사가/“사랑해요”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당신이 지금 혼자라 해도/이 세상은 여전히/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재즈를 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시를 읽어야 하는 시간이다. “죽을 것 같은 세상이세요.” 나태주 시인처럼. “시를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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