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비문(非文)이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글을 고쳐주다 보면 그렇다. 발표를 듣다 보면 더하다. 말과 글이 종종 낯설게 들리는 까닭은, 말을 뱉는 순간 비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서 비문이네요"라고 말할 때, 이는 ‘비문’이라는 개념이 오직 문장 구조에만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하기에도 적용되는지를 되묻게 한다. ‘비문’이란 무엇인지, 왜 부사 하나, 어미 하나로 문장이 지저분해지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사는 글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얼어 죽을 부사가 된다. 글을 숨차게 만든다. "그는 매우 빠르게 달렸다"라는 문장은 겉보기에는 친절하지만, "그는 달렸다." 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매우’와 ‘빠르게’라는 독자의 상상력을 갉아먹고, 작가의 자신 없는 태도를 드러낸다. '정말로', '사실은', '어쩌면', '솔직히 말해서' 같은 부사들은 감정의 진심을 표현한다기보다 그 진심을 숨긴다. 문장의 빈틈을 채우는 듯하지만, 사실은 논리의 구멍을 감춘다. 부사의 남용은 설명의 과잉이고, 과잉은 진심을 퇴색시킨다.
말도 마찬가지다.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요, 그러니까 이제 그게 뭐냐 하면요…”라는 식의 말은 긴장과 주저의 표시다. 언어는 긴장을 내비치는 순간, 설득력을 잃는다. 말을 꾸미는 습관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신뢰를 멀어지게 만든다. 말과 글은 같아야 한다. 둘 다 군더더기 없이, 명확해야 한다. “비문이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말로서, 비문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적 문제를 넘어서 사고의 구조를 드러낸다. 비문은 곧 비사유(非思惟)일 수 있다.
간결한 문장은 간결한 사고에서 온다. 생각이 정돈되었을 때 우리는 덜 말하게 된다. 덜 쓸 수 있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나는 시간이 부족해서 긴 편지를 썼다”라고 말했다. 짧게 쓰는 일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짧게, 곧게, 투명하게 쓰기 위해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좋은 문장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기본 문장의 구조, ‘주어-서술어’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는 떠났다.’, ‘시간은 흘렀다.’. 이것들처럼 명료한 문장은 감정과 진심을 거두어내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마음에 파고든다. 반면 부사나 형용사로 치장된 문장은 독자의 상상을 가로막는다. 문장은 화장을 덜 할수록 아름답다. ‘정확한 문장’이 ‘아름다운 문장’이다.
모든 수식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것들, ‘의식 없이 끼워 넣는’ 것들이 문제다. 어떤 수식어는 작가의 철학을 드러내고, 어떤 부사는 문장의 리듬을 만든다. 대부분의 부사는 습관에서 나온다. 습관은 독자를 무시한 채 자신의 불안을 달래려는 언어적 방어기제일 뿐이다.
말할 때도 써 내려갈 때도 ‘덜어내기’를 배워야 한다. 삶이 그렇듯 글과 말도 비우는 과정에서 빛난다. 군더더기를 버리는 훈련은 단지 미문(美文)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명료함, 존재의 진실함과 맞닿아 있다. 말은 곧 사람이다. 허튼 말이 많으면 사람이 가벼워 보인다. 많은 부사가 달린 문장은, 마음이 불안하다는 표시일지도 모른다.
‘말을 하면서 비문이네요’라는 말이 진정 유의미하려면, 말하는 방식부터 문법적이고 명료해야 한다. “방금 말씀이 비문으로 들렸어요”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면, 말과 글의 일치를 향한 첫걸음을 뗀 셈이다. 언어는 도구이기 전에 존재의 방식이다. 단정하고 담백하게 써야 한다. 덜 쓰고, 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주하는 많은, 문장들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는 인격과 지성이 담겨 있다.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일은 곧 나를 수양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며 덜어내고, 말을 하며 비문을 경계하여 본다. 비문이 없는 문장은 단단함이 보인다. 잘 쓴 시와 소설은 비문들이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비문의 말씨 자들이다. 비문 속에는 독자에게 상상하게 하는 배려가 들어 있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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