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시집 같은 영화 다섯 편이다. “사람들은 말로 서로를 위로해. 말로 서로를 죽이기도 하지.”
영화 <그녀>(Her, 2014년 미국, 2019년 재개봉) 중, 대사다. 영화는 본래 시각 예술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시각보다 언어의 결을 따라 흐른다. 화면이 멈춰 있어도, 음악이 멎어 있어도, 대사 한 줄이 마치 시처럼 가슴을 흔든다. 그리고 우리는 문득, 그 한 문장이 우리 삶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을 느낀다.
대사가 곧 시가 되는 영화들. 시는 때로 철학이고, 고백이며, 시대의 주검 위에서 피어난 영혼의 꽃이다. 영화 속 대사가 시처럼 다가온다는 것은, 그 말이 단순한 설명을 넘어서 감정과 사유의 무늬를 머금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Her)>의 영화는 내면의 언어, 사랑의 시학이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는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다룬다. 영화에서 대사는 철저히 속삭임이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다. 테오도르가 말한다. “나는 네가 없는 세상도 사랑하게 될 거야.” 이 한 줄에 담긴 애정과 상실, 그리고 성숙. ‘사랑’은 소유가 아님을, 감정의 절정이 이별 이후에도 남을 수 있음을 말하는 이 대사는 현대적 사랑에 대한 시적 해석이다.
영화 <패터슨>(Paterson, 2017년 )은 시인을 꿈꾸는 버스 운전사다.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은 도시를 달리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상을 담담히 따라간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대사들은 대부분 시이거나, 시의 씨앗이다. 그가 읊는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는 도시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꽃은 설명하지 않아도 돼. 그냥 피면 그만이야.” 대사와 시의 경계가 무너진다. 말이 아니라 존재로 살아가는 시인의 눈동자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의 눈에 잠긴다.
<봄날은 간다>(2001년) 영화는 침묵보다 더 슬픈 말, 한 마디로 표현한다. 한국 영화 중에서도 시적 대사로 회자 되는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서 유해진이 던진 유명한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짧지만 강력한 이 문장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 중 하나로 남았다. 설명할 수 없기에 더욱 슬프고, 붙잡을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 이 한 문장이 우리 모두의 이별 경험을 소환한다.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6년)는 두 낯선 이의 철학적 대화로 시작하는 영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시리즈는 온전히 대화로 이루어진다. 그 중 비포 선라이즈는 비엔나를 걷는 제시와 셀린의 대화를 통해 존재와 시간, 사랑에 대해 성찰한다.
“사람들은 타인과 있을 때 더 자신을 잊고, 혼자일 때 더 진짜의 자신을 만나게 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끼는 존재의 흔들림과 혼자일 때만 비로소 발견되는 자아. 이 영화는 대사가 곧 철학이고, 철학이 시가 되는 아름다운 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7)는 사랑, 기억, 그리고 사막을 그린 영화다. “당신은 나를 비로소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어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이 대사는 전쟁과 상실, 기억과 치유의 길목에서 툭 던져지지만, 오랫동안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시는 흔히 누락 된 감정을 붙잡는다. 영화 속 그 한마디의 대사도 그러하다.
“나는 사막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없으면 그건 단지 모래일 뿐이에요.” 대사가 시가 될 때, 영화들의 공통점은 대사가 설명이 아닌 감각으로 다가온다. 시가 이미지로 감정을 불러오듯, 이들 영화의 대사는 삶의 풍경 너머에 있는 감정의 흐름을 언어로 그린다.
감정을 고백하지 않아도 느껴지게 하는 영화, 눈물 흘리지 않아도 슬픔이 전해지는 영화. 우리는 그런 영화를 통해 언어의 기적을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
어쩌면 영화는 커다란 시집이고, 감독은 편집하는 시인이며, 배우들은 시의 낭송자일지도 모른다. 관객은 그 시를 가슴에 품음과 언젠가 삶의 어느 날 우연히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이듯 말한다. “그때 그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있었지. 정말 시 같았어.” 영화는 시인에게 느낌과 시의 씨앗을 주머니에 담아주는 선물이다. 극장에 간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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