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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일 칼럼] ”찬란과 어둠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어요“ 당연히 찬란을 선택할 것이다. 시인 이병률의 <찬란> 시집을 받아들고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 인생은 찬란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찬란은 시간 속의 부분이다. 시간과 고통은 견디는 힘이다. 그렇다면 찬란도 고통을 견디는 힘에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시인들이 흠모하는 W.H. 예이츠는 “쉽게 살라고 말한다” 누군들 쉽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이츠가 쉽게 살라는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세상사 권력과 금전에 치우치며 아웅다웅 어렵게 사는 사람의 경고일 것이다.
‘눈이랑 손이랑/깨끗이 씻고/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깜짝 놀랄 만큼/신바람 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 거야/아이들이/보물찾기 놀일 할 때/보물을 감춰두는/바윗 틈새 같은 데에/나뭇 구멍 같은 데에/행복은 아기자기/숨겨져 있을 거야.’ 허영자 시인의 <행복> 전문이다.
허영자 시인의 행복은 찬란과 같은 동의어로 보고 싶다. 정말 어딘가에 신바람 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깜짝 놀랄 일은 수없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시를 같이 공부하는 시도반이 순례길에, 나섰다. 순례길은 발끝과 협력을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무릎과도 협조가 되어야 한다. 디자이너 메리 퀸트는 “여자의 나이는 무릎에서 나타난다”라 한다. 우리 생의 상당 부분은 무릎의 협조가 아니면 가야 할 길에 제한을 받는다.
무릎이 순례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시도반이 어디쯤의 순례길에 가고 있는지 모른다. 절반이 넘은 순례길이라면 무릎과의 협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분명, 찬란은 나에게 있다. 그렇지만 나의 발끝과 정신이 찬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좀 더 세세하게 말하면 눈이랑 손이랑 나의 부분 신체들이 따뜻한 마음을 만들고 순례의 길을 내는 것이다.
시인은 서점에 들르면 먼저 들리는 곳이 시집코너다. 시인에게 시집코너는 찬란히 숨 쉬고 있다. 시인의 고뇌와 멈춰버린 시간, 뜨거운 언어들을 시계가 가듯이 가게 한다. 나이가 지긋한 수녀님이 시집을 사 들고 아주 가볍게 든 에코 가방에 넣는다. 기본이 시와 같이 정갈하게 은총을 밟아가며 살아가는 수녀님이 시집을 사 가는 모습이 찬란하다.
책을 펴내면 기본으로 100만 부 이상을 판매하는 이언 매큐언은 “세상을 파괴하는 상상력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상상력”이 있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 찬란도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
찬란의 신비를 깨우는 것은 발끝이 비밀인지 모른다. 발끝이 가는 곳에 찬란도 따라간다. 찬란의 끝에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에 대하여 탐색도 한다. 길을 걷는 것은 누구나 떠날 수 있지만, 그 길 위에서 먼 찬란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사실은 아니다. 찬란은 진리를 깨우는 자의 것이다.
찬란을 자연으로 말하면 가파른 숲과 드높은 벼랑이다. 그곳에는 초록빛 시골 풍치가 있다. 분명한 것은 찬란과 행복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찬란히나 행복,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전제된다. 받는 찬란과 사랑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다.
노출되지 않는 사상이나 행동은 저항받지 않고 오히려 감동을 준다. 찬란은 진리의 빼어난 예증에 속하는 것인지 모른다. 윌리엄 워즈워스 시인은 ‘훌륭한 시는 강력한 감정이 저절로 넘쳐 흐르는 것“이라 한다. 찬란이란 축복의 속눈으로 보는 것인지 모른다. 가슴에 기쁨이 차고 넘치는 것은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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