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학인은 선거가 끝나며 ’쓸쓸주‘를 마셨다. 농학자와 굴렁쇠에 앉았다. 쓸쓸주란 학인이 만든 술자리 핑계 언어다. 한잔하려면 제목이 필요하다는 개똥 같은 생각이다.
술집의 벽걸이 TV에서 당선자 음성이다. 학인은 말없이 리모컨 끄기 버튼을 눌렀다. 단골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지만, 리모컨 선택권을 맡겨 주리라, 믿는 구석이 있었다.
건너편에서 연극인 차림 50대가 속삭이듯 선거결과를 나눈다. 그것도 3분여 만에 끝맺고 자신들 이야기로 넘어갔다. 꾀나 지적인 사람들이라는 분위기다.
학인이 농학자와 쓸쓸주를 마시는 것은, 대선에 결이 대충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마디 결과를 주고받는다. 옆의 연극인처럼 짧다.
다시 주제는 울진의 산불이다. 금강소나무에 불길이 가지 않았다는 정보에 묘한 반응이다. 소방당국이 200년 소나무에 불길이 가지 않기 위하여 최선의 방어를 폈다. 학인은 ”농가가 탔다, 집주인 노파의 표정이 선하다.“ 금강소나무가 중요한가에 의견을 말한다. 농학자는 학인의 의견을 묻는다.
“금강소나무를 살리는 것이 좋아요. 민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학인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가를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농학자는 “금강소나무를 살리는 것이 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농가의 경제적 가치가 금강소나무에 못하다는 의견이다.
학인은 농학자의 말을 들으며 문득 며칠 전 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정답보다 중요한 것은 찾는 과정이야“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놓고 만들어진 영화다.
우리가 대선의 후보를 놓고 당선자와 비 당선자의 사이에서 다양한 심정을 만난다. 그래서 학인과 농학자는 쓸쓸주를 마시는 것이다. 쓸쓸주가 한 순배도 돌기 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방당국의 불길 잡기에 ’금강소나무‘냐, ’민가‘냐에 의견이 갈라지고 만다.
정답만을 찾는 세상에 방황하던 영화 속의 ’한지우‘에게 올바른 풀이 과정을 찾아 나가는 이유를 알려주는 교훈에 의미를 찾아본다.
우리가 이번 대선에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선거의 기간은 혐오의 시간이었다. 혐오의 결과는 지친 사회를 만든다. 혐오의 과정은 의견의 사람들끼리 연대를 만든다. 그들이 모이는 광장도 다르다. 손에 든 것들도 다르다. 그 광장을 벗어나면 혐오의 마음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만든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전쟁이 끝나는 나라에서 나타나는 병명이다. 그것이 한국의 대선 기간에 나타난 후유증 들이다.
학인은 말한다. 대선의 결과, 백서는 당인들이 하는 것.민초인 우리는 이번 선거를 조금 멀리서 보는 지혜가 나올 것이다. 세상에는 흑백, 무채색도 있다. 차별화된 콘셉트와 색감으로 구현한 공간과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다른 색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구별해 나가면 지혜의 수혜자들이 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첫 번째가 언론이다. 두 번째가 혐오로 지치게 만든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남녀 성별의 차별을 선거에 이용하였다. 과거에 정치가 지역과 이념을 가지고 이용했다면 이번 선거는 성인지를 가지고 이용했다.
선한 국민은 그들의 선동에 농간당해만 했다. 거기에 언론은 무차별 가세한다.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선거결과에 답이 될 수도 있다.
맺자, <시회의 탄생>을 집필한 강필임 교수의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아보자.
삶은 한순간이고/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그러니 한밤중에/ 촛불이라도 켜놓고 놀아야 할진대/ 더이상 무엇을 망설이는가!/ 우아한 담소와 술잔으로/ 마음 주고받으니/ 어느새 달빛도 다가와/ 함께 취하는 듯하다.// 시가 아니면 이 아름다운 순간을 / 무엇으로 담아내겠는가!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