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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은 태조 이성계의 작품이다

최창일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19/07/29 [14:18]

뽕은 태조 이성계의 작품이다

최창일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19/07/29 [14:18]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한국인 성인 중 <뽕> 영화를 감상한 자보다 보지 않은 자를 헤아리는 것이 더 쉽다는 분석이다. <뽕>의 원작은 나도향이 1925년 개벽잡지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일제 강점기의 비참한 시대상과 붕괴되는 성윤리와 그리고 원초적인 본능, 물질적 욕구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1985년에 이두용 감독이 다소 허풍도 치고 육덕(肉德)을 가미, 이미숙의 농염한 연기를 끌어냈던 작품이다.  <뽕>은 <애마부인>을 비롯한 선정적인영화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뽕>을 단순하게 이대근의 팽팽한 모시 속옷만 생각해선 안된다.  역사적으로 뽕나무는 우리 조선왕조 건국을 이끈 혁혁한 역사속의 나무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7년인 1398년 9월 12일에 신을 몸으로 받는다는 강신제(降神祭)를 지내고 나온다. 그리고 담담하게 교지를 반포한다.

 

“농업과 양잠은 의식(衣食)근원이다. 백성의 먹는 것과 삶의 질에 관계 된다. 봄에는 뽕나무를 심고, 5월에는 뽕나무의 열매를 거두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왕도정치의 근본이라 했다. 왕도정치의 근본은 백성을 잘 먹게 하고 잘 입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태조 이성계의 어록이 아니다. 

 

뽕나무가 왕도정치의 물적 토대라는 점을 가장 먼저 얘기한 사람은 맹자다. <맹자>에서 왕도정치는 인(仁)과 의(義)로 하는 것. 인과 의로 정치하기 위해서는 뽕나무를 심어 50세가 넘은 자가 추위(옷)에 떨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맹모삼천지교’만을 생각하지만 맹자는 정치 술사며, 풍부한 지식의 학자다. 다시 말하면 뽕나무는 옷이 되고 열매는 강장제가 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임금은 뽕나무심기 정책을 펼 때마다 맹자의 주장을 인용했다. 어찌 보면 맹자와 태조는 이미숙 여배우의 옷을 벗긴 음란물 조장 죄가 성립될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의 윤리적인 풍토를 염두에 둔 유머쯤으로 웃어넘기자.

 

태조가 뽕나무를 심게 하던 한양은 물론, 조선은 그야말로 뽕밭 천지였다. 오늘의 잠실, 잠원의 지명이 말하듯 뽕나무단지 였다. 그러니 그 옛날 뽕밭은 물레방앗간과 같은 연인들의 은밀한 뽕텔(성을 추구하는 장소)이 되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상당수의 아이들은 뽕나무 밭이 생산지로 봐도 무리는 아니다.

 

성북구의 간송미술관을 오르다보면 선잠단지(先蠶壇址사적83호)라는 표지가 나온다. 그 안에는 뽕나무가 살고 있다. 대략 70그루 정도로 보인다. 가장 나이가 많은 뽕나무는 70세다. 성종 시대의 유적이다.

 

선잠단의 신위는 1908년 7월 사직단으로 옮겨졌다. 선잠단지는 600년 전 조선시대의 왕비들이 누에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에게 제례를 지냈던 곳이다. 당시는 의례(儀禮)를 중요시 했다. 이곳은 우리 문화의 중요한 상징을 보여주는 장소다.

 

조선시대는 임금은 선농(先農)에 참여하고 선잠(先蠶)은 왕비들이 의례를 지냈다. 의례는 이틀간 지냈다. 매우 진중, 정성을 드린 의례였다. 왕비 뿐 아니라 혜빈(惠嬪) 세손빈(世孫嬪) 내명부(內命婦) 외명부(外命婦) 여러 옹주(翁主), 군주(郡主) 당저(當宁)의 왕손부(王孫婦)도 참여했다. 이는 당시의 선잠이 얼마나 중요한 정부 정책인지 짐작이 간다. 

 

뽕나무는 조선시대 군수와 지사의 인사평가에도 반영했다. 1406년 태종은 곡물농사와 뽕나무 심는 정책을 실시했다. 태종은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기 위해 밭과 들의 개간을 적극 장려했다. 태종은 백성이 잘살게 되면 나라의 기강이 잡히고 자신의 인기도 오른다고 믿었다. 태종뿐 아니라 단종도 뽕나무를 심어 큰 효과를 거둔 자에게 상을 내렸다. 실패한 군주, 연산군도 선잠에 매우 관심이 컸다. 제아무리 폭군의 연산도 선잠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다.

 

선잠은 오늘날 휴대폰처럼 첨단 산업의 하나로 이해하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을 새마을 운동 창시라 자라 한다. 하지만 600년 전에 선잠을 통한 새마을 운동은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에 비교되지 않게 뽕나무를 통한 실크생산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중국은 실크로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까지 했다. 태조는 뽕나무를 배어내고 다른 작물을 심는 곳이 있다는 상소에 버럭 화를 내며, 군수 지사들에게 문책을 했다. 뽕나무를 연구하고 뽕나무를 쉽게 재배하도록 기술도 보급했다. 

 

한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뽕나무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이루는 담 주위에 살고 있는 나무다. 키가 12미터나 된다. 이 나무들은 조선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 왔다. 창덕궁에 뽕나무는 조선건국을 같이 했다는 증거다. 성종 때는 경복궁에 뽕나무가 3,590주나 됐다. 창덕궁에만도 1천주가 있었다. 지금의 밤섬도 뽕나무밭이었다. 

 

오늘날 잠실, 선릉역, 영등포, 구로 등 수많은 식당에는 뽕잎을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있다. 뽕쟁이, 뽕맞다, 뽕을 뽑는다는 등의 단어는 뽕의 문화를 엿보게 한다. 이미숙의 <뽕>은 태조 이성계의  정책이 만든  산물이다. 그래서 송가인은 ‘뽕따러 가세’를 열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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