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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여행과 칸트의 산책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8/10/30 [10:10]

추사 김정희의 여행과 칸트의 산책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8/10/30 [10:10]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세계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람은 독일의 칸트(1724~1804)다. 그는 철학적 사유의 한 시대를 열었다.


같은 시대에 한국에는 추사 김정희(1766~1856)가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추사는 우리나라에서 예명(藝名)을 가장 많은(100여개) 학자로도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는 학문적 역량이 뛰어나 서원(書院)에서 강의를 하면 전국에서 3천 여 명이 모이는 인기 학자였다. 그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다. 예술가로, 금석학과 경학, 시, 서, 화,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 역사 등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다.

 

김정희에 대해서는 대부분 서예가 혹은 화가로서의 예술적 측면에서 크게 조명되는데, 이는 생전에 ‘평소 저술한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싶지 않아 문자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물론 체계적인 논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토대로 진리를 추구했다.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기울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금석학, 경학 등에서 세운 업적은 조선의 역사학을 비롯해 사상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은 1809년 24세 때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의 연경에 갈 때 자제 군관의 자격으로 수행, 여행을 한 일이다. 중국에서 그는 옹방강, 완원 같은 청나라 명사들을 만나 교류했다. 이들은 모두 당대를 풍미한 경학자(經學子)로, 고전을 연구하는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들이었다. 완당이라는 호는 완원이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좀 더 추사를 부연하자면 당시 그의 인기는 오늘의 TV인기강사 설민석에 해당하였다. 추사와 설민석 선생을 비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라는 것을 밝혀둔다.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김정희는 칸트에 비하여 세계적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물론 당시의 대한민국의 국력이 김정희의 학문의 역량을 세계화 시키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방탄 소년단을 비롯, 스포츠, 문화에서 한류의 바람이 세계화 되는 것은 한국의 역량이 그만큼 커졌다.


칸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한 번도 독일 떠나지 않는 독특한 철학자다. 문학을 하거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행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담아오곤 하였다.


칸트는 강단이 있는 쾨니히베르크 대학을 20여 년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그가 근무하는 대학 근처의 공원 산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래서 칸트가 걸었던 쾨니히베르크의 대학공원 근처를 철학자의 길이라고 명명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김 교수가 즐겨 걷는 산책코스를 철학자의 길이라고 명명하는 거와 같다.


우리는 김정희라는 뛰어난 교수를 생각하면 플라톤을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좋은 저서를 남겼다. 그렇지만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플라톤에 의하여 그의 학문은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제자를 잘 둔 스승은 제자에 의하여 학문적 평가가 재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문학이나 예술 세계는 그러한 경우가 많다.


당대에는 그렇게 평가를 받지 못한 학자가 사후에 크게 평가를 받는 경우는 하나같이 제자들의 노력의 결과다.


칸트는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 178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한국에는 1946년 최초의 민립대학(광주조선대학)이 설립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대학이 없었던 풍토에서 칸트와 비교되는 것이다.


김정희는 1856년 10월10일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의 향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남긴 유언은 “좋아(gut)”였다.
심오하고 장대한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좋아“로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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