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조정래 선생은 “자기가 노력 한 게 스스로를 감동하게 만들 정도가 되어야 그게 정말로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천재를 만난다.
피카소의 성장배경에는 아버지의 근무지에 따른 잦은 이동이 피카소에겐 새로운 환경의 경험을 하게 했다. 스페인의 모든 도시의 특징은 투우라는 강인한 에너지가 넘친다. 그리고 강렬한 색감이었다. 피카소의 천재적인 소향도 있었지만 스페인이 피카소를 성장 시켰다.
피카소는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 사창가 카페를 찾아다니며 그곳의 생활을 마음껏 그렸다. 어찌 보면 피카소는 ‘여행’의 화가였다. 피카소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청년이 된 피카소는 프랑스를 방문한다.
프랑스는 박물관, 미술관을 출입하는 화가에게는 무료입장이였다. 피카소는 수많은 화가들의 기법을 하루 종일 관찰하는 열정을 가졌다. 시(詩)에서 차운(次韻)이라는 용어가 있다.
김소월이 스승 김억의 시를 차운하여 공부를 하였다. 피카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리 여행 중 얻은 색채의 발견은 그를 감동시켰다. 전통적인 스페인의 회화의 훌륭한 색채, 스페인 여인들이 즐겨 걸치는 숄의 검정 색조, 스페인 풍경에서 흔히 보게 되는 황갈 색조나 갈색 색조가 아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그 도시가 펼쳐 보이는 전혀 새로운 색채를 경험하게 된다.
피카소는 파리의 곳곳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피카소는 목탄·파스텔·수채·유채 등 다양한 매체로 파리의 생활을 묘사했다〈거리의 연인들; Lovers in the Street〉, 1900). 또 〈물랭 드 라 갈레트 ;Moulin de la Galette〉(1900)는 카탈루냐 출신의 라몬 카사스뿐만 아니라 툴루즈 로트레크나 스탱랑 같은 프랑스 화가들을 모방했다.
항간에는 친구 카사헤마스의 연인, 제르멘르와 피카소가 내연의 관계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피카소의 염문 사실은 확인이 되지 않지만 피카소는 큰 충격을 받고 조국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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