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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의 쫒기는 망명(亡命)도 여행 이었다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7/09/13 [22:52]

이미륵의 쫒기는 망명(亡命)도 여행 이었다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7/09/13 [22:52]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이미륵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다. 그는 숨 가쁘게 일경에 쫒기는 여행가였다. 그의 소설은 독일에서 오늘 날까지 중고등학교(바이에른 주와 헤센 주에서 5종이나 됨)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2008년 한독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에서 독일 방송사 BR이 공동으로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원작을 토대로 <압록강은 흐른다>를 제작하였다. 120분 기획드라마다. 같은 해 연출을 맡은 이종한 감독에 의해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1946년 독일에서 발표된 작가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린 이미륵이라는 이름은 잊혀진 이름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는 ‘라일강’의 독일에 동양의 ‘압록강’을 흐르게 한 작가다. 이 모든 것이 여행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미륵은 1899년에 황해도 출생하여 1951년 독일에서 영면(永眠)하는 파란만장의 여행망명자다. 이미륵의 이름은 30세가 넘은 어머니가 불가에서 기도한 덕에 태어났다는 뜻에서 ‘미륵’이라는 친 불교스런 이름으로 지었다(그의 여권의 이름은 이의경(李儀景.별명은 정쇠).

 

청년 이미륵은 투철한 조국애로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다 일경에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 봉준 씨의 소개로 마르세유를 거쳐 1920년 독일 망명에 이른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과 다르게 그는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강의를 했다. 사진 촬영에도 일가견이 있어 틈틈이 여행에서 만든 작품을 독일의 여러 신문에 기고했다.

 

이미륵이 독일에서 얼마나 인격자로 살았는지에 관한 일화가 있다. 전후 독일경제 사정은 한국의 50년대와 같이 굶주림의 시절이었다. 시민들은 배급을 받아서 연명한다. 이미륵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루는 그가 받는 보급 표에 한 장이 더 딸려 들어왔다. 이미륵은 주저 없이 반환한다. 이런 이 박사를 두고 신문은 미담으로 소개 한다. 가짜 보급 표까지 나돌던 궁핍한 시기에 조선의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망명의 여행객 이미륵은 조국에서 이미 결혼해서 처자가 있었다. 쫒기는 여행자 이미륵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홀로 생을 마감한다. 조국을 떠나기 전 아들을 낳았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에 대해 아는 이가 지금까지 없다. 그가 남긴 40여 편의 소설은 독일인에게 ‘꼬레아’를 올바르게 인식시켰다. 그는 우리민족과 문화를 어느 외교관보다 어떤 광고보다 더 마음속 깊이 넣어준 여행망명가라고 볼 수 있다.

 

고인은 아직도 양지바른 그래펠핑 묘지에 영면하고 있다. 묘지 관리비는 그의 친지들이 내주고 있다. 거룩함을 받는 것은 그의 살아온 생을 말한다. 이미륵의 선구적인 공적은 독문작품을 통해서 한국 및 동양사상, 그리고 우리문화를 서구에 전도한 점이다. 그는 30년이라는 장기간 유럽 여행 속에서 결코 동양적인 것을 경시하지 않고 서구의 기계주의 문명에다가 한국 사상을 우아한 스타일로 투입시킨 망명의 아름다운 여행가다.

 

1927년에는 <한국어 문법>(미발표)을 탈고 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보이려는 시도도 했다. 1930년대는 독일의 문예잡지 <아틀란티스>에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과 한국의 사진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미륵을 통하여 쫒기는 망명도 여행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게 된다. 인간에게 진지한 진보의 기회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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