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동희의 행간읽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필자는 철학과 심리학이 끈끈한 관계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프로이트를 넘어선 융과 라캉을 들여다 보았지만 별반 관심이 가지 않았다. 80년대 당시에는 오로지 사회변혁에만 눈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에 눈길을 돌리게 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성남시장 이재명 씨였다. 필자 눈에 비친 그는 예삿사람이 아니었다. 쉽게 분석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말을 했다. 단정적이었고 격정적이었다.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만큼 성공한 사람이었다. 가난 속에서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갔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성남시장이 되었으니 자신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거칠었다. 쌍말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쌍말은 해서는 안되는 금기어로 배우고 살아온 필자에게 이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말, 그것도 쌍말. 대체 그는 어떤 심리 상태의 인간이란 말인가? 자크 라캉은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은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투영한다는 라캉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하일라이트인 그의 형수에 대한 쌍말을 접했다.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에서 형수는 어머니 다음, 즉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에 쌍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할 수 없는 금기어 중 금기어 아닌가?
대체 성남시장 이재명 씨의 내면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는 라캉의 개념이 맞다면 그의 내면세계도 쌍말세계다. 여기서 필자는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외면은 이미 성공한 사람인데 여전히 살풍경한 내면세계를 갖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그의 팍팍했던 유년시절이 여전히 그를 지배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주지하다시피 아픔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이는 삶에 있어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지만 정반대 결과를 낳기도 한다. 특히 독선적 행태를 뒤풀이해서 자신의 자기정체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이재명 씨의 쌍말을 우려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는 사적 인간이 아닌, 공적 인간이기에 필자의 우려는 공적이다. 대통령 자리까지 내다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의 쌍말은 당연히 클로즈업돼야 한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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