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한국에서 '문인협회 회원'이 된다는 것은 오랫동안 문단이라는 영예로운 울타리 안으로 진입함을 의미했다. 등단 제도를 거쳐 협회에 이름을 올리고,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월간지에 시나 소설을 얹으며, 해마다 돌아오는 문학상 시상식에서 동료들의 성취를 축하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익히 보아온 한국 문인협회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문학 공동체의 이면에는 서글픈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대다수 문인은 창작 노동만으로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출판사와의 불공정 계약에 노출되어도 홀로 냉가슴을 앓기 일쑤이며, 디지털 환경의 급변과 인공지능(AI)의 습격 앞에서는 개인의 무력함을 절감할 뿐이다. 한국의 문인 단체들이 '문화 친목 단체'나 '명예 공동체'의 성격에 머무는 동안, 작가의 구체적인 삶과 권리는 제도적 사각지대에 방치됐다.
눈을 돌려 유럽의 선진적인 문인협회들을 바라보자. 영국,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문인 단체들은 작가를 '고결한 정신적 예술가'로만 추앙하지 않는다. 그들은 작가를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창작 노동자'로 규정하고, 작가의 생존권과 권익을 지키는 강력한 이익단체이자 제도적 방패로 기능한다. 우리 문단이 나아갈 미래의 힌트가 바로 그곳에 있다. 유럽 문인협회가 증명한 세 가지 방패다.
영국·독일·프랑스 유럽의 주요 문인 단체들은 작가가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법률, 제도, 복지라는 삼각 구도의 정교한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협회(SOA)는 사업 동반자자 법률적 대리인다. 1884년에 설립된 영국 작가협회(Society of Authors, SOA)는 영국의 공식 무역노조(Trade Union)다. 이들이 문인을 위해 하는 일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출판 계약서 무료 검토 및 법률 자문(Contract Vetting)'이다.
신인이나 독자적인 기반이 없는 작가가 거대 출판사와 독소 조항이 가득한 계약을 맺지 않도록, 협회 소속 법률 전문가들이 계약서를 꼼꼼히 뜯어보고 독소 조항을 걸러내 준다. 작가가 저작권 침해나 인세 미지급으로 고통받을 때 체계적인 법적 대응을 대신해 주는 곳도 바로 협회다. 이들은 문학을 철저히 '지식재산권 비즈니스'로 접근하며 작가의 권리를 방어한다.
독일 문인협회(Verband deutscher Schriftstellerinnen und Schriftsteller, VS)는 독일의 거대 서비스직 노조 연맹인 'ver.di(베르디)'의 산하 조직이다. 이들의 위력은 출판 업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협상력에서 나온다. 독일 문인협회는 도서출판협회와 직접 머리를 맞대고 '출판 표준 계약서(Normvertrag)'를 제정하여 이를 업계 전반에 강제한다. 최소 인세율과 저작권 적용 범위를 법제화 수준으로 묶어둠으로써 출판사의 '갑질'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또한, 강연회나 낭독회에서 작가가 받아야 할 최소 수수료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창작 노동의 하한선을 지켜낸다.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인 단체인 프랑스 문인협회(Société des Gens de Lettres, SGDL)는 1838년 오노레 드 발자크,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등 대문호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유서 깊은 조직이다. 프랑스는 일찍이 문인을 독립적인 직업인으로 인정하고 복지 제도를 설계했다. SGDL은 문인들이 프랑스 특유의 '예술인, 저작자 사회보장 제도'에 원활히 진입할 수 있도록 행정적, 제도적 가교역할을 수행한다. 작가가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면서도 직장인처럼 건강보험과 연금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증빙을 돕고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데 앞장선다. 프랑스의 문인협회는 단순한 단체를 넘어, 국가 문화 정책의 핵심 파트너로 기능하는 셈이다.
우리 한국의 문인 단체들은 어떠한가.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를 비롯한 국내외 한인 문인 조직들은 대개 행사의 기획과 명예적 보상에 치우쳐 있다. 매년 수많은 문학상이 수여되고 연간 동인지가 세련된 표지로 발간되지만, 그것이 작가의 주머니를 채워주거나 법적 불이익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출판 시장의 침체 속에서 계약금도 없이 책을 내는 '자비 출판'이 횡행하고, 대형 플랫폼의 연재 시스템 속에서 웹소설 작가나 번역가들이 과로와 불공정 정산에 시도 때도 없이 노출되어도 문인협회가 이들을 위해 전면에 나섰다는 뉴스는 듣기 어렵다.
문인협회가 작가의 경제적·법적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을 신성시하는 문화적 전통 탓에 작가 스스로 자신의 창작을 '노동'으로 부르기를 주저했고, 협회 역시 이익단체로서의 칼날을 갈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문인협회가 체질을 개선하고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세 가지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첫째, '법률 방패'를 장착한 서비스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문인협회 내에 상근 법률 지원 센터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다. 영국의 SOA처럼 회원들이 출판사나 디지털 플랫폼과 계약하기 전, 조항의 위험성을 무료로 검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저작권 침해나 무단 도용, 인세 횡령 사태가 발생했을 때 협회가 직접, 대리인이 되어 법적 공방을 수행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작가들은 협회비의 가치를 체감하고 협회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둘째, 연대를 통한 '표준 계약과 적정 보상'을 강제해야 한다. 독일의 VS처럼, 문인협회는 출판 업계 및 문화체육관광부와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아 구속력 있는 표준 계약서를 확립해야 한다. 특히 종이책을 넘어 전자책, 오디오북, 웹툰·웹소설 플랫폼 등 다변화된 매체 환경에 맞는 구체적인 인세 하한선과 창작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작가의 노동에는 반드시 적정한 대가가 따른다"라는 원칙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강력한 이익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국가 복지 제도와의 행정적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에는 '예술인 고용보험'과 '예술인 복지재단'의 여러 사업이 존재하지만, 정작 복잡한 행정 절차와 증빙의 어려움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문인이 수두룩하다. 프랑스의 SGDL처럼 한국의 문인협회는 회원의 창작 활동 실적을 공인하고 복지 제도의 혜택을 원활히 받을 수 있도록 돕는 '행정적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 고령의 문인이나 불의의 재난을 당한 문인을 위한 자체 긴급 구호 기금의 규모도 대폭 키워야 한다.
문학의 영속성은 문인의 생존에서 온다. 문학은 위대하지만, 그 위대한 문학을 짓는 작가의 몸은 유한하며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일상인 이다. 모국어를 지키고 문화적 지평을 넓히는 일은 작가의 굶주림과 불안을 담보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한국의 문인협회가 과거의 명예와 품격에만 안주한다면, 청년 작가들은 더는 협회를 찾지 않을 것이며 문단은 빠르게 고립될 것이다.
유럽의 문인 단체들이 수 세기에 걸쳐 증명해 온 것처럼, 이제 우리 문인협회도 작가의 생존권을 정면으로 다루는 '실천적 방패'가 되어야 한다. 작가의 펜 끝이 꺾이지 않도록 법과 제도로 무장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의 문인 단체들에 요구되는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인 혁신이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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