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차림으로 운명을 바꾸어 성공 신화를 만든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은 호암 이병철(삼성 창립자)이다. 호암의 패션 철학을 관통하는 첫 번째 핵심은 ‘옷은 곧 그 사람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 인식한다. 평소 임직원들에게 “구겨진 셔츠는 마음의 태만을 드러내고, 단정한 구두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라고 강조했다. 삼성을 이끌던 시절,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출근한 젊은 직원에게 “네 옷이 바로 네가 올린 보고서다”라고 준엄한 일침의 일화는 유명하다. 서류에 적힌 숫자의 정확성보다, 서류를 들고 온 인간의 외양에서 드러나는 정신의 긴장감을 먼저 꿰뚫어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동양의 전통적인 선비 정신인 ‘의관정제(衣冠整齊)’와 궤를 같이한다. 겉모습을 바르게 정돈함으로써 내면의 흐트러짐을 바로잡는 정신 통일의 과정이다. 호암은 매일 아침 완벽하게 다려진 셔츠의 깃을 세우고 구두끈을 동여매면서, 오늘 하루 마주할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을 준비했다. 인간의 정신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쉽다. 옷이 느슨해지면 생각도 안일해지고, 옷이 팽팽하게 날이 서 있으면 판단력도 예리해진다. 호암은 옷차림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스스로 날마다 새로 고(日新又日新)치는 자기 관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행동을 바꾸어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 실천적 철학이었던 셈이다.
그의 옷차림은 철저한 ‘대타인주의(對他人主義)’와 ‘T.P.O(시간·장소·상황)’에 기반을 둔 사회적 언어였다. 많은 이들이 호암을 값비싼 맞춤 양복만 고집한 세련된 탐미주의자로 기억하지만, 그의 옷차림이 진정 빛났던 이유는 ‘나를 뽐내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호암은 집 안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소박하고 편안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문을 나서거나 손님을 맞이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자리이든 그 상황에 맞는 완벽한 예복을 갖추어 입었다.
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언(無言)의 협상 카드로 작용했다. 상대방은 호암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이 나를 이토록 귀하게 여기는구나’라는 깊은 감동과 존중을 먼저 느끼게 된다. 자기 관리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인물이라는 신뢰감은 굳이 수많은 말로 사업의 비전을 설명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의 완벽한 옷차림은 전 세계의 정·재계 인사들과 신뢰를 구축하고, 삼성을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릴 수 있었던 최고의 외교술이자 기회를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호암의 옷차림은 시대를 앞서가며 미래를 시각화하는 ‘디자인 경영’의 원형이었다. 호암은 1950년대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국내 최초로 국산 양복감 ‘골덴텍스’를 개발했을 당시, 사내에 맞춤 양복 부서(훗날의 장미라사)를 만들어 국산 원단의 완성도를 직접 온몸으로 테스트했다. 새로 지은 양복이 나오면 곧바로 입지 않고, 옷걸이에 걸어둔 채 며칠 동안 전체적인 실루엣과 바느질의 완성도를 묵묵히 감상한 뒤에야 몸에 걸쳤다는 일화는 그의 지독한 탐미주의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미 반세기 전에 ‘제품의 본질은 기술뿐만 아니라 미학적 완성도에 있다’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패션 감각은 1980년대, 삼성이 사활을 걸고 반도체 사업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도전할 때 절정에 달했다. 70대의 고령이었던 호암은 당시 은회색으로 세련되게 머리를 염색하고, 차가운 금속성 느낌의 메탈릭 회색 슈트나 화사한 메탈릭 핑크색 재킷을 입고 반도체 라인을 시찰했다. 주변의 모든 참모와 관료들이 어둡고 무거운 무채색 양복에 갇혀 있을 때, 호암은 혼자서 시대를 몇십 년 앞서간 첨단과 혁신의 컬러를 몸에 감고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노익장의 과시가 아니었다. ‘삼성이 나아갈 미래는 과거의 낡은 관습을 깨부수는 혁신에 있다’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온몸을 던져 조직과 세상에 선포한 시각적 지도력이었다. 리더의 옷차림이 던지는 파격적인 에너지는 경직되어 있던 조직의 공기를 바꾸었고, 끝내 대한민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이끄는 미래의 불씨가 되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옷차림의 철학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준다. 편리함과 효율성만을 좇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편안한 차림이 ‘개성’으로 포장되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아침 어떤 옷을 선택하고 어떻게 몸을 정돈하는가는, 단순히 패션의 문제를 넘어 ‘오늘 하루를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선언과 같다.
옷차림은 운명을 바꾸고 미래를 바꾼다. 내가 입은 옷의 가격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흐트러짐 없는 마음가짐이 나를 명품으로 만든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의관을 정제하며 매 순간 자신과 세상을 향한 예의를 다했던 호암의 패션 철학. 그것은 오늘날 눈앞의 유행에 흔들리는 현대인들이 반드시 되짚어봐야 할, 삶을 품격 있게 경영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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