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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일 칼럼] 11분, 그 짧고도 긴 소외의 시간. 현대 사회에서 '성(性)'은 곳곳에 범람하지만, '교감'은 오히려 희귀해졌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문제작 『11분』을 통해 이 지독한 역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소설의 제목이자 핵심 모티프인 '11분'은 남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평균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전 지구적 문명을 지탱하는 거대한 담론들에 비하면 이 11분은 보잘것없는 찰나에 불과하다. 코엘료는 묻는다. 우리는 그 짧은 11분을 위해 나머지 수만 분의 삶을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그 11분 동안 진정으로 상대의 영혼에 닿아본 적이 있는가?
브라질의 거장 파울로 코엘료가 『11분』에서 제시한 '교감'의 근거를 성경적 신비주의, 동양의 수행 철학, 그리고 실존적 고찰을 통해 분석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문학적·철학적 울림을 주는지 탐구해보고자 한다.
코엘료가 주인공 마리아라는 인물을 통해 전하는 교감의 첫 번째 근거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세속적인 장소에서 발견되는 '성스러움'에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성은 오랫동안 금기시되거나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치부됐다. 코엘료는 성경의 『아가(Song of Songs)』를 호출하며 이를 뒤집는다. 아가서는 남녀의 육체적 사랑을 노골적일 만큼 아름답게 찬미하며, 이를 신과 인간 사이의 지고한 사랑에 비유한다.
마리아가 스위스 제네바의 거리에서 겪는 육체적 노동은 표면적으로는 타락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영혼의 합일'이라는 신비주의적 주제를 끌어올린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언급된 '반쪽 신화'와 맞닿아 있다. 인간은 본래 하나였으나 신에 의해 둘로 나뉘었고, 평생을 바쳐 잃어버린 나머지 절반을 갈구한다는 이 철학적 근거는, 『11분』 속의 교감을 단순한 성적 유희가 아닌 '존재론적 회귀'로 격상시킨다. 즉, 교감이란 나뉘었던 두 우주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신성한 의식인 셈이다.
코엘료는 서구적 이성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의 원리를 동양의 오래된 지혜에서 찾는다. 육체적 관계를 단순한 마찰이나 분출이 아닌, '에너지의 교류'로 정의한다.
탄트리즘(Tantrism)의 차용이다. 인도의 탄트라 철학에서 성 에너지는 척추 아래에 잠든 '쿤달리니'를 깨우는 강력한 영적 도구다. 마리아가 화가 랄프 하트를 만나면서 경험하는 변화는 육체적 쾌락을 넘어선 내면의 각성이다. 코엘료는 육체의 결합이 에너지를 순환시켜 인간을 더 높은 차원의 의식으로 인도하는 수행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음양의 조화(Tao)는 동양의 도교적 관점에서 남성성(양)과 여성성(음)의 만남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행위다. 『11분』에서 강조하는 교감의 근거는 일방적인 정복이나 소유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에너지를 주고받는 '흐름'에 있다. 이 흐름이 끊길 때 관계는 11분의 기계적 행위로 전락하며, 흐름이 이어질 때 11분은 영원으로 확장된다.
코엘료의 문학적 힘은 관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제네바의 성 노동자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그들의 실존적 고뇌를 담아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정작 관계의 순간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벽을 쌓는다. 코엘료는 이를 '통제'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닫고 육체만을 빌려주는 행위는 진정한 교감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교감의 실질적 근거는 '취약함(Vulnerability)'의 수용이다.
상대방 앞에서 나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과 약점을 완전히 드러낼 때, 즉 '통제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11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의미를 잃고 영적인 차원의 소통이 시작된다. 마리아가 깨달은 진실은, 성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는 용기가 교감의 핵심이라는 사실이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속을 흐르는 정신은 지독하리만큼 숭고하다. 작가는 성을 통해 인간의 고독을 말하고, 고독을 통해 다시 사랑의 필연성을 역설한다. 그가 제시한 교감의 근거들을 종합해 볼 때, 진정한 만남이란 다음의 세 가지 층위가 겹쳐질 때 발생한다.
신화적 층위, 서로를 잃어버린 영혼의 반쪽으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 에너지적 층위, 육체를 넘어선 내면의 흐름을 주고받는 조화. 실존적 층위, 상처받을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는 태도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고립감을 느낀다. 『11분』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진정한 교감은 화려한 기술이나 물리적인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동자 속에서 나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려는 그 찰나의 '진심'에 있다는 것이다.
코엘료의 통찰처럼, 우리가 11분이라는 육체의 감옥을 깨고 나와 영혼의 대화를 시작할 때, 사랑은 비로소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문학적 인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교감의 본질이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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