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특징들이 있다. 정답을 싫어한다. 정답 없는 시를 만드는 일이 그들의 정신이다. 소설이나 희곡은 짜임새에 의해 진행이 된다. 노랫말과 시와의 관계가 약간 틈새가 있는 것도 그렇다. 노래는 어느 정도 답이 있다. 물론 시가 노래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양가성을 가진 것쯤으로 보자.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다. 찬송가와 성경책 앞쪽에는 십계명을 의무처럼 소개한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요약, 전체의 대강과 같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십계명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말한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나 성직자는 십계명을 하나의 독립적인 사법 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해를 구하기도 한다. 번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십계명은 “무엇을 하지 말라”로 되었다.
베르나르는 십계명에 주목할 것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아니라는 사실이라 한다. 만약 십계명이 금지의 계율이라면 <살인을 하면 안 된다>,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십계명은 <너희는 살인을 하지 않으리라>, <너희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리라> 하고 미래 시제로 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일부 성서 주석가들은 십계명이 계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언이라고 주장했다. <너희는 살인이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므로 언젠가는 살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살기 위해 남의 것을 훔쳐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기에 언젠가는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뜻일 수 있다고 해석을 한다.
십계명을 베르베르의 관점에서 읽으면 범죄자를 벌하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변화가 생길 것을 말한다. 베르베르의 해석은 작가이며 시인과 같은 여유로운 해석으로 십계명을 풀어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법이 정착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정착이 되었느냐 묻는다면 그리 쉬운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군주들이나 장수들이 오랫동안 독단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했다. 영화 <노량>에서는 일본의 장수가 이순신 장군에게 전쟁에 밀리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의 장군은 전략의 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현장에서 혀를 자르고 배의 기둥에 묶어두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군주와 장수들의 형태였다. 군주나 장수는 누구의 의견을 묻지 않고 법을 집행하였다. 그러한 법의 질서가 오늘에도 횡횡하고 있다.
모세가 기원전 1300년경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은 일은 독립적인 준거 체계의 출현이다. 이 준거 체계를 바탕으로 개인의 정치적 이익에 기여 하는 ‘자의적인 법률’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률이 확립’되어 갔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십계명이 올바르게 번역이 되거나 사용되는 것인가에 베르베르는 색다른 견해를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검사가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은 검사가 하는 정치는 매우 균형의 법률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가 내세운 말은 사람에 충성하는 검사기 되지 않겠다는 말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2년이 넘어서는 그의 법리 균형에 국민은 지지하지 않는다. 무려 70% 이상이 그의 법의 균형을 의심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법체계의 바탕이 무너졌음을 국민은 불쾌해한다. 베르베르가 십계명을 보는 관점과 비교하면 검사 출신 대통령의 통치 개념은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한다. 갈수록 ‘더 나아지는 인간의 법이 확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를 이해하고 시를 읽는 것은 갈수록 ‘맑아지는 그 무엇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타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로 본다. 그래서 폭력이 아니고 전쟁이 아닌 강력한 민주주의 실현의 법을 원한다.
무정부 상태는 강자에 유리하다. 무법의 상태는 법의 집행자의 세상이다. 지금의 세상은 무법인가, 강자가 유리한 세상인가는 어지간한 사람은 알고 있다. 베르베르가 설명하는 십계명을 우리 모두 다시 읽어보면 한다. 십계명은 신이 준 인류 최초의 헌법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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