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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지면 얼마나 행복했나?

윤희완 / 자원봉사TV 편집인 | 기사입력 2022/03/06 [14:56]

다 가지면 얼마나 행복했나?

윤희완 / 자원봉사TV 편집인 | 입력 : 2022/03/06 [14:56]

[감사의 편지]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 반에 보통 60~70명이 있었습니다. 그런 반이 8~9반이었고 그리고도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등교를 하여 공부를 하면서 남녀 학생이 합반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5학년 때 내 짝은 몹시 마르고 까무잡잡한 아이였고 도시락을 한 번도 가져 오지 않았고 학교에서 주는 옥수수 빵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빵도 다 먹지 않고 남겨서 가방에 넣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또한 연필이나 공책도 없을 때가 많았고 그림도구는 아예 준비를 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것을 많이 썼는데 정말 아껴서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보였고 마음으로 미안해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반 쯤 쓴 크레용 세트와 도화지를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짝 애가 빵을 받아서 자리에 앉는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내 도시락과 바꾸어 먹자고 했더니 그래도 되느냐고 하면서 짝궁은 너무나 맛있게 도시락을 비웠고 나는 옥수수 빵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나는 짝꿍에게 앞으로 종종 바꾸어 먹자고 했더니 그 애는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나는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학교에서 짝궁과의 이야기를 했더니 그저 미소를 지으시며 내일 부터는 밥을 많이 담아가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 윤희완 감사의 편지 편집인.     ©성남일보

다음날도 바구어 먹었는데 그 애는 반 정도 먹고 남겨서 새까만 비닐봉지에 모두 담아서 책가방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고, 집에와서 아버지에게 또 짝궁의 그 이야기를 미주알 고주알 다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짝이 어디 사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하굣길에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짝과 함께 나오던 길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애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짝궁은 무서워하면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을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아버지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며 다만 그 아이를 안아 주었고 울지 말라고 마음을 달래주면서 우리의 손을 잡고 그 애의 집까지 같이 걸어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비탈진 밑의 동네는 온통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집들이었고 생전 처음 와 보는 이상한 세계였습니다.

 

나는 못 들어가고 아버지만 들어갔는데 한참 있다 나온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입을 연 아버지는 짝궁에게 잘해주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고향 사투리로 ‘니 나이 때의 아이레는 한 창 먹을 때 인데, 도시락을 반 남겨서 집에 가져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이디, 아바 지레 그 이유가 궁금 했더랬어. 밥을 가져가서 저녁으로 먹는다면 그렇게 굶기는 부모는 못 쓰는 사람들인 게야. 

 

그런데 네 짝은 그 밥을 가져가서 물을 더 부어 끓여, 아픈 아버지께 죽을 끓여 드린거야. 아바지레 많이 아파서 어머니가 장사해서 겨우 먹고사는데 아버지에게 죽을 끓여 줄 쌀 한줌이 없었던 것이야. 

 

새까만 보리밥만 해 먹으니 아픈 사람이 먹지를 못하는데, 네가 준 도시락의 쌀밥 죽을 먹고 많이 원기를 차렸다고 하는구나. 너의 짝궁 그 애는 심청이 못지 않은 아이야!“

 

나는 우리 아버지가 짝궁 집과 가족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짝궁 애가 쌀밥과 빵을 바꾸어 먹은 일과 친구의 도시락을 다 빼앗아 먹은 일을 들켜 너의 아버지가 혼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울음이 터졌다는 일과 짝궁의 어머니가 시장의 난전 한 곳에서 고정적인 장사를 하게 되었고 쌀가마니가 왔다고 그 애가 내게 울면서 후일 말을 해서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애가 심청이 같은 효자이기에 작은 도움을 주었다고만 했고 나도 그렇게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엄마가 알면 시끄러워 지고 싸움이 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었고 때로 아버지의 자선은 지나칠 때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장사해서 남 다 퍼준다.“고 대들면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항상 하시는 말이 있었습니다. ”모두 다 가지면 얼마나 행복했나? 곳간에 많이 쌓아두면 더 행복하네? 쪼그만 나누어주면 신간이 편한데, 그거 이 더 좋지 않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후일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신간이 편하다는 그 말의 뜻을 나는 요즘 알아가는 듯합니다.

 

두 개 가지고 있어서 행복이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두 개를 나누어 한 개만 있게 되는데, 그 충만한 느낌은 두배, 세배가 되니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를 이제 알게 됩니다.

 

이북에서 살 때 조부모님이, 집에 찾아오는 사람 그 누구도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내가 못하는 것 아니라고 하셨다며, 한 번도 재산이 준 적이 없노라고 아버지는 늘 내게 말씀 해 주셨습니다.

 

나누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준 이 유산이 내게는 무엇보다 귀한 유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그저 습관이 되어 나눈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오늘도 ”다 가지면 얼마나 행복했나?“라며 껄껄 웃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렇게도 선명하게 귓전에 울려옵니다.

 

짝궁은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으로 간 것으로 기억합니다. 엄마 혼자의 힘으로 가정을 꾸려나가기엔 너무 힘겨웠나봅니다.

 

그래도 병석에 누워계시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과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온 가정의 가족들이 웃을 있어 행복했다면서 눈물짓던 그 아이는 낮에는 공자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검정고시를 치러서 학력을 인정받게 되어 회사에 중역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영문을 모르고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이고 있는데, 고급 승용차가 지나가다가 다시금 뒤로 후진하여 와서 신사 한 분이 차에서 내리시며 ”차가 고장이 나셨습니까?“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귀에 낮 익은 소리 같아서 자세히 얼굴을 쳐다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짝궁인 그 아이가 틀림없어서 ”혹시 원당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으셨나요?“ ”예“ ”저 모르시겠어요? 저 금순인데요.“ ”아니 그럼 쌀밥 도시락을 주던 짝궁~~!“

 

20여년이 지난 짝궁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천생연분으로 만난 인연이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 자주 만나게 되었고 양가의 동의를 얻어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한 평생 짝궁이 되었으며 도시락이 아니라 한 솥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천상병님이 삶을 소풍 온 것 같은 삶이라고 표현하셨듯이 우리의 삶이야 말로 소풍 온 것 같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어려웠던 날들과 힘들었던 일들을 헤쳐온 과거를 거울 삼아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 행복함을 감사하면서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양손에 사과를 쥐고 있으면 옆의 사람에게 서슴없이 한 개를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다시금 빈손에 더 큰 것을 쥘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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