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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거리감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기사입력 2020/09/05 [08:33]

너는 거리감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최창일 / 시인· 이미지평론가 | 입력 : 2020/09/05 [08:33]

[최창일 칼럼] 사랑은 거리감으로 한다. 사랑 하며 거리에 의미를 둔다면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리감이기 때문이다. 거리감의 뜻은 ‘어떤 대상과 일정한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느낌’ 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거리감에 대하여 고민 하고 연구한 학자도 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hall 1914~2009, 미국)은 개인 영역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부모 자식 간이나 연인, 부부사이처럼 신체접촉이 허용되는 친밀한 관계에서는 45센티미터 미만의 밀접한 거리를 말한다.

 

친구나 직장동료처럼 가까운 지인의 경우는 45~120센티미터에 해당하는 개인적 거리로 정의 한다.

 

인터뷰나 공식적인 만남 같은 상황에서는 120~370센티미터에 해당하는 사회적 거리다. 무대 위의 공연자와의 관객사이는 370센티미터 초과하는 공적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홀은 지금처럼 코로나19바이러스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대한 마음의 필요한 거리를 정의 하였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다가가면 불편해 하거나 갑갑함을 느끼고 거리감을 두려 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사이가 만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거리를 두지 않고 만나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이 거리감의 행복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무너질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존 그레이(1951~ ,John Gray 미국)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남자와 여자의 거리에 대한 특성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남자들은 친밀하고 싶은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자율성을 되찾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여인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고무줄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달아나려고 하고, 고무줄의 탄성이 한계에 다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욕구라고 한다. 이것을 억지로 참으면 신경질 적이고 무기력하여 우울증세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그레이는 여자는 이와 반대로 남자친구나 남편이 거리감을 두려 할 때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상대방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다. 답답한 나머지 대화로 마음을 풀어보려면 남자는 더 멀리 달아나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거리감이라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인은 거리감을 두거나 사람과의 관계를 마스크라는 것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에 익숙해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사 이래 처음 겪는 문화적 충격이다. 그래서 일부는 거리로 뛰쳐나와 거리감을 두는 보건 정책에 시위를 한다.

 

에드워드 홀의 거리감에 대한 연구는 한낮 사치스러운 논문에 불과 할까. 거리감을 두고 싶지 않아도 거리감을 두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며 구속받지 않는 거리가 인간에게 소중함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똑 같이 느끼고 똑같이 생각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야한다. 서로 거리를 두지 않고 만나는 것, 구속 받지 않는 것이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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