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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필연성과 교훈

김기권 / 전 남양주 오남중학교 교장 | 기사입력 2020/04/30 [15:05]

4·19혁명의 필연성과 교훈

김기권 / 전 남양주 오남중학교 교장 | 입력 : 2020/04/30 [15:05]

[김기권 칼럼]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북위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한 후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3년 간 미 군정이 실시됐다. 

 

처음에는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려 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1948년 5월 10일 UN한국임시위원단 감시 하에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이뤄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됐다. 

▲ 4.19 묘역 전경.

최초 선출 의석은 200석으로 했으나 198명(제주도 4.3사건으로 2명 부재)으로 개원해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에서 최고연장자 이승만(74)을 만장일치 박수로 임시의장으로 선출했고  다음날 31일 제헌국회는 초대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했다. 

 

이어 7월 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드디어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 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로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이승만 후임으로 신익희가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대통령이 선출되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드디어 대한민국 자립기틀이 완성된 것이다. 이 때 남쪽만의 총선거에 반대한 김구, 김규식은 불참했다

 

이에 앞서 대통령 임기를 취임식이 있는 날인 7월 24일로 정할 것인가, 정부가 수립된 8월15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8월 15일로 국회가 의결했다.       

 

제헌국회 최고업적은 헌법제정과 농지개혁법 제정이다. 소작인들 수확물 70%를 지주들이 농민 착취하는 현상이 되어 나라 발전에 걸림돌로 최고의 악성 종양이 제거 된 것이다 

 

1950년5월 농지개혁법개정안통과 시행세칙 실시로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완료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현실은 자작농 16%. 국민총소득35불(弗) 문맹률78%. 6.25사변 2개월 직전 토지개혁으로  이것은 세계적 성공사례가 되며 농민들의 동요를 미연에 방지했다.  

 

제헌국회 의원 대부분 자기 계파로 채운 이승만은 불과 2년 만에 민심을 잃고 여론이 악화되어 갈 무렵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든 김구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한국독립당 약칭 한독당 같은 한독당원이면서 현역 포병장교 소위 안두희로부터 권총 4발로 암살되었다.  10일간 다녀간 조문객이 120여만명 7월 5일 장례식에 40-50여만명 참여 전 국민적 애도를 표했다. 

 

사건 당시 정부에서는 한독당 내분으로 보고 단순 처리해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안두희를 6.25사변이 나자 감형시키고 오히려 안두희를 2계급 승진시켜 현직에 복귀토록 했다. 

 

당시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정계에서 물러나 2선에 있었고  그의 집무실 경교장에 침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야당의 힘을 모으는데 큰 힘이 되고  암살자 안두희는 현역포병 장교 소위로 포병사령관 장은산 지시로 이루어 졌고 특무대장 김창룡등이 모의해  일제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는 김구에 대항하는  일제시대 고급관료들을 배경으로  보고 있으나 그 배후에 이승만을 많은 국민들은 생각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에는 3대 정치파동이 있었다. 부산정치파동(발췌개헌). 사사오입사건, 보안법 파동이이다. 여기에서 4.19혁명발생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부산정치 파동은 6.25전쟁이 한 참 진행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이승만은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철저하게 패배해 국회 간선으로 대통령되기가 어려워지자 대통령 직선제를 국회에 제출했으나 부결되었다. 

 

정부는 공비토벌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10여명을 국제공산당과 관련 혐의로 구속하고 80여명을 연금하는 등 갖가지 방법 동원하여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헌했다. 

 

이 때 부통령 김성수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처사라 비난하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발췌개헌안이란 장택상, 이범석이 이끄는 신라회가 주동이 되어 정부안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안 국회단원제를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7월 4일 군경이 의사당을 포위하는 위협 속에서 의원 166명이 참석 직선제를 통과시켜 독재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승만은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1주일 만에 대통령 후보등록을 마감하고 10일째 선거를 치러 2대 대통령이 된다. 

 

2대 대통령 취임식은 1952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되었고  전시중이라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사사오입개헌은 제1공화국 집권세력 자유당이 사사오입 반림법을 내세워 정족수 미달이었던 헌법 제3호가 개정된 사건이다.

 

1954년 5월 20일 국회의원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두 번 대통령을 지내서  더 이상 이승만이 대통령 출마할 수 없게 되자 자유당은  국회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라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원 수 203명의 2/3명인 135.33....즉 136명이 찬성해야 하는데 11월 27일 투표에서 가결정족수 136명에 1명이 부족해 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했으나 이틀 후 자유당은 동대문조직원 이정재 일당을 방청석에 배치하고 위압적 자세로 203명의 2/3은 135.33.....대한 해석을  당시 대한수학학회장 최윤식을 내세워 사사오입 즉 0.33은 사사오입법칙에 의거 0.33 이하는 버리는 것이 정상이라며 가결정족수 135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자유당은 억지 주장하여 가결 선포하고 불법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유증은 바로 표출된다.  민주당 의원 이철승은 단상에 올라가 국회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 했으며 시중 각 언론들은 그 부당성을 연일 성토했다. 

 

3대 대통령후보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유세 중 뇌익혈로 사망하자 이승만이 단독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유권자들 20%가  무효표를 던져 자유당정권에 비판적 의사를 전달했다.  

 

4년제 민의원을 뽑는 선거로 1958년 5월 2일 제1당 자유당이 126석 민주당이 80석

야당의 비약적 발전에 겁먹은 자유당은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언론과 야당 탄압의 근거를 마련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그 중 가장 정치적 이용에 용이한 항목이  제7조다.  남북 대립의 현 상황에서 반공국시에 이현령 비현령 탄압의 수단으로 역대 정권이 잘 활용하여 인권탄압의 도구가 되어왔다. 

 

국가의 존립. 안전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로 인한 국민적 저항이 대단했다. 각 언론은 물론 야당의 저항이 극심했다. 

 

이 법에 대하여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김병로가 반기를 들어 현재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데 옥상 옥의 악법이다로 평했고 어떤 국회의원은 쥐 잡으라고 사온 고양이가 쥐는 안 잡고 시암닭을 잡는 걸과가 올 것이다고 평했는데 과연 그 후 군사정권에서 잘 활용했고 현재는 개점휴업 상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2년간 집권한 84세의 이승만은 4선에 도전, 당시 여당 자유당은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민심 이반을 알고  사전에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계획적으로 조직 활용했다.  

 

때마침 당선 유력 야당 후보자 조병옥이 1960년 2월 15일 신병치료차 도미 미국 워싱톤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사망하자 대통령 단독후보가 된 이승만은 당연히 무투표 당선되지만 문제는 부통령이다.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집권하게 되는 데서 자유당은 더욱 더  부정선거에 집중하게 된다. 

 

제일 먼저 경찰들을 설득하고 고급경찰들 사표까지 미리 받아놓고 내무부 공무원들 동원 체제 확립  말단 면단위까지 조직망 운영했다. 

 

때마침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들어 민생이 극도로 어려워지고  두 차례의 무리한 헌법 개헌으로 헌법 파괴당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등이 부정선거에 개입 심지어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당원이 살해되는 사건 발생 민주당은 선거거부 운동까지 벌렸다. 

 

투표 시 3인 1조로 서로 이기붕에 날인 한 것을 보여 주는 사례도 있고. 금품살포는 기본이며 유권자명부조작과 대리투표 사전투표와 투표함 바쿼치기 야당참관인 축출에 당시 유행어 고무신짝투표 올빼미투표 피아노투표등이 공공연하게 세인들의 비웃음이 널리 퍼졌다. 

 

개표과정에서 이기붕 자유당 후보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관은 득표수를 주려서 발표토록 했다. 당시 이승만 후보 85% 이기붕 후보 73%로 당선자 발표가 있었다. 

 

2월 28일 대구학생 의거

 

대구에서 야당후보 장면이 선거유세를 하도록 되어있는데 일요일임에도 학생들 참여를 막고자 중.고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 사냥등 동원하려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나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말라“고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리니 전국 각처에서 3월 14일까지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3.15 마산 의거

 

3.15부정선거규탄에 시민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 시위도중 경찰 발포로 10여명이 사망하고 870여명이 부상하는 사건에 경찰과 자유당은 공산당 책동으로 몰고 갔다.

 

당시 이승만은 공식으로 담화를 통해 마산시위는 배후에 공산당이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시위 중 행방불명된 16세 마산상고 1년생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앞바다위에 떠오르자  다시 시위는 계속되고 이때도 경찰 총에 2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3.15부정선거 규탄대회 후 귀가 도중 정치깡패들의 폭력으로 다수학생들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알려져 4.19일 전국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서울에서는 경무대 정문까지 시위대가 진입하자 경찰들이 집중 사격하여 현장에서 다수의 사상자자가 발생했고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727여명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니 이승만은 계엄령을 발동하여 진압하려 했지만  군인들마저 시위대 앞에서 우호적으로 나오며 대학교수단까지 시위를 행하니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1960년 4월 26일 혁명의 완성

 

시위는 계속되어 4월26일 드디어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하야성명이 발표되어 제1공화국은 처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장면 부통령도 사임하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독립을 위해 정말 공적을 많이 쌓고 6.25전쟁에서 조국을 구한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이승만 박사의 공과(功過)는 후세 학자들의 평가가 말해주겠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선거 획책은 용서 받지 못할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며,우리나라가 억만년 번영을 위해 어떤 선거든  부정과 부패는 용서할 수 없다는 교훈을 4.19혁명은 소리쳐 외쳐본다. 

▲ 김기권 회장.     ©성남일보

제1공화국 멸망의 원인은 부정부패를 척결치 못한데서 왔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이 관리들의 부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 때의 유행어로 빽이라는 용어가 너무나 많았다. 

 

군대 가서 총 맞아 죽을 때도 빽 하고 죽었다는 말은 농담만은 아니다. 

 

당시 세계 언론에 영국의 한 신문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필 만큼어렵다고 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결코 청정국이 아니다. 크고 작은 선거에서 아직도 부정선거의 의혹들이 시들지 않고 계속 진행 중이며 이번 2020년 4월 총선에서 부정선거 고발건이 100건이 넘는다하니 어느 때에 가서 싱가폴. 덴마크처럼 청정국이 될까. 오늘도 속절없이 꿈속에서나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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