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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그리고 히딩크의 전혀 다른 한국여행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8/09/10 [08:45]

하멜, 그리고 히딩크의 전혀 다른 한국여행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8/09/10 [08:45]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우리는 역사속의 300년 전 <하멜 표류기>를 기억한다. 1650년에 하멜이라는 청년은 26세에 네덜란드 동인연합회(VOC)소속선박의 포수로 승선한 후 빠르게 승진한다.

 

1653년 스페르베르호에 회계원으로 승선하여 일본 나사사키로 여행의 기회를 얻었다. 여행은 늘 예측 불허의 상황들이 전개 된다. 하멜 일행은 폭우로 인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제주도 대정읍 해안가에 표류한다. 표류인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36명이라는 자료가 비교적 선명하다.

 

1654년에 서울로 송환 되었다가 1656년 전라병영으로 이송되어 7년(조선 억류기간은 13년)간 억류되어 살았다. 1666년 일곱 명의 동료들과 일본으로 탈출한다. 하멜은 조선에 억류되었던 13년간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보고서를 VOC에 제출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멜 표류기>로 알려지게 된다.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당시 임금은 효종이었다. 조선 제 17대 왕이자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 것이다. 병자호란 패배 후 볼모로 청나라 선양에서 8년을 머물다 형인 소현세자가 죽자 돌아와 세자가 되어 1649년 즉위하게 되었다. 효종은 청에 대한 원한이 깊어 서인세력을 등용하면서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등 역동의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하멜의 일행이 제주에 난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울로 이송을 지시한다. 물론 효종대왕이 일일이 난파한 여행객까지 관여를 하지 않았을 것이란 좋은 해석도 하고 싶다. 어떻든 화란(和蘭)이라는 나라의 외국인 36명이 서울로 이송되며 보고를 받은 것은 펙트다.

 

그런데 효종의 결정은 화란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고 강진으로 유배를 선택한 것이다. 효종이 청나라에서 8년간의 볼모로 끌려가 가진 고생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죄 없는 하멜의 일행을 조국으로 보내져야 했다.

 

시간은 흘러서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렸다. 한국의 축구가 세계에 알려지고 축구 명가 가의 계기가 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월드컵의 중심에 네덜란드 사람, 히등크가 있다. 히딩크는 1946년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파르세벨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 여행을 하며 정통 축구의 지식을 쌓고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며 감독이 된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4강 신화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명예 시민증도 받았다. 강진의 군수는 364년전 하멜의 역사를 떠올리며 히등크가 한국에 귀화 한다면 강진의 군민이 될 것을 거론도 했다.

 

역사는 늘 이렇게 아이러니 하다. 하멜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다만 파도에 의해 난파, 죄인 아닌 죄인으로 차가운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생이란 초대받은 자와 난파자(초대받지 못한자)의 차이는 극명하게 다르다.

 

300년을 거슬러 보면 초대받은 자, 히등크는 뜨겁게 축구영웅 대접을 받았다. 영암순천 고속도로 성전IC에서 내려 직진을 지나면 강진 병영읍에 이른다. 고려시대에 현청이 있던 곳이다.

 

조선 초기 태종 17년(1417년)에 병영(兵營)을 설치하여 병마절도사를 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역사의 히스토리를 간직한 은행나무가 서있다. 이 나무는 전라병영으로부터 약 5백 미터 정도 떨어진 동성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하멜 표류기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하멜일행이 여기서 억류생활을 하며 이 은행나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강진 병영에 머문 기간이 7년이다. 이 은행나무와의 인연이 클 것이 분명하다. 역사의 기슭에는 늘 나무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서있다.

 

하멜의 일행은 일본에 탈출 후 본국과 연락이 되어 1668년 조국으로 돌아간다. 하멜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 등으로 여행을 하며 하멜표류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1670년에야 조국으로 간다. 하멜이 탈출 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였을까? 또 왜 죽을 때까지 미혼을 고집했을까. 혹자들은 하멜이 강진 병영에 가족을 두고 탈출, 이들을 잊지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말도 있다.

 

여행가는 길을 잃어봐야 진짜 여행가다. 하멜은 여행에 길을 잃어버린 최초의 여행가로 기억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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