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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유언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기사입력 2017/12/20 [10:50]

어느 시인의 유언

최창일 / 시인 · 한국문인협회 대변인 | 입력 : 2017/12/20 [10:50]
▲ 최창일 교수.     ©성남일보

[최창일 칼럼]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 시인이 자유가 억압된 시절에 발표한 시집의 제목이다.

 

권일송 시인은 1957년에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동시에 신춘문예에 당선, 유망 받는 시인으로 평가 받았다.

 

그는 4.19의 학생 시위가 있던 날, 신문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게 되었다. 시인은 으슥한 밤이 다하도록 책상 앞에서 원고지를 메웠으나 한 줄의 시도 생산 하지 못했다.

 

시인은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무언의 항변”이라는 제목만의 빈 원고를 신문사에 송고했다. 신문사는 다소 당황 하였으나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제목만 있는 빈 여백의 편집을 감행하였다. 신문이 나오자 시인은 공안 담당자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시인은 이 땅의 학대(虐待)받은 지성과 진실 앞에, 그리고 오늘의 몰락한 불구의 노래를 부른다는 시집의 후기를 남기고 있다. 농구를 좋아한 시인은 신동파 선수의 경기에는 독한 술병을 앞에 놓고 경기를 관전하거나 청취하였다. 한 개의 슛이 성공하면 한 잔의 술을 마셨다. 신들린 신동파 선수의 슛은 권시인의 술잔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신동파 선수는 신장 190cm로 가공할 득점력으로 아시아 무대를 휩쓸어 한국 남자 농구의 전설로 불리고 있었다. 농구의 인기가 높은 필리핀에서 열린 1969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의 맹활약으로 '신동파 신드롬'을 일으켜, 아직까지도 필리핀에서는 유명 인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터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선수로도 꼽힌다.

 

결국 시인은 시대의 술과 신동파의 슛에 의한 술잔에 의하여 술로 쓰러지게 되었다. 요행히 병상에서 일어난 시인은 “이 땅은 나를 술을 못 마시게 한다”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지간히 건강을 회복하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 하였다. 권시인은 결국 술로 인하여 병상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권시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하였다.


“나를 높은 곳으로 데려다 달라” 아들과 부인은 시인의 말대로 서울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으로 안내하여 주었다. 시인은 불빛이 찬란한 서울의 풍경을 보면서 말했다.


“시인을 만족 시키는 것은 여행을 하면서 눈을 감는 것이다” 기차는 여행자를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여행의 수단이자 그 자체로 여행이 된다. 보들레르 시인이 굳이 어느 곳을 여행지로 염두 해 두지 않아도 된다.

 

기차역에 가서 표를 사고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다 드디어 듬직한 보호자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열차에 오르는 모든 과정은 우리들을 비참한 이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줄이 없는 그 열병인 여행, 그자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유언 후 삼일 만에 눈을 감았다.


권시인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이 고향이다. 고추장 광고에 나왔던 고풍스런 기와집이 그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목포 문태고등학교 강단에서 모국어를 가르쳤다. 기차와 목포역은 그를 늘 설레게 하였다. 기차는 어디엔가 계속 달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기차의 레일은 목포가 끝이었다.

 

시인은 레일이 끝나는 목포역 이정표에서 무한 허무감을 가졌다. 시인은 항구의 목포에서 강의를 하는 것에 만족 해 하였다. 술잔을 기우리다가도 연안부두로 나간다. 홍도와 압해도를 오가는 연락선을 보는 것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오가는 배들은 희망을 향하여 뱃고동을 울린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속을 끓어 본적이 있는가? 혹시 지금이 그러한가?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관계는 주고받음의 공식이 비교적 분명해야 한다고 시인은 생각하였다.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면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지혜가 온다고 했다.


시인은 어느 날 유럽 길에 오르면서 이러한 시를 쓴다. 항공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지붕 위를 지날 때는 “구름이 담긴 엽서를 그녀의 마당으로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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