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칼럼]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 시인은 1957년에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동시에 신춘문예에 당선, 유망 받는 시인으로 평가 받았다.
그는 4.19의 학생 시위가 있던 날, 신문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게 되었다. 시인은 으슥한 밤이 다하도록 책상 앞에서 원고지를 메웠으나 한 줄의 시도 생산 하지 못했다.
시인은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무언의 항변”이라는 제목만의 빈 원고를 신문사에 송고했다. 신문사는 다소 당황 하였으나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제목만 있는 빈 여백의 편집을 감행하였다. 신문이 나오자 시인은 공안 담당자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시인은 이 땅의 학대(虐待)받은 지성과 진실 앞에, 그리고 오늘의 몰락한 불구의 노래를 부른다는 시집의 후기를 남기고 있다. 농구를 좋아한 시인은 신동파 선수의 경기에는 독한 술병을 앞에 놓고 경기를 관전하거나 청취하였다. 한 개의 슛이 성공하면 한 잔의 술을 마셨다. 신들린 신동파 선수의 슛은 권시인의 술잔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신동파 선수는 신장 190cm로 가공할 득점력으로 아시아 무대를 휩쓸어 한국 남자 농구의 전설로 불리고 있었다. 농구의 인기가 높은 필리핀에서 열린 1969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의 맹활약으로 '신동파 신드롬'을 일으켜, 아직까지도 필리핀에서는 유명 인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터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선수로도 꼽힌다.
결국 시인은 시대의 술과 신동파의 슛에 의한 술잔에 의하여 술로 쓰러지게 되었다. 요행히 병상에서 일어난 시인은 “이 땅은 나를 술을 못 마시게 한다”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지간히 건강을 회복하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 하였다. 권시인은 결국 술로 인하여 병상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권시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하였다.
기차역에 가서 표를 사고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다 드디어 듬직한 보호자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열차에 오르는 모든 과정은 우리들을 비참한 이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줄이 없는 그 열병인 여행, 그자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유언 후 삼일 만에 눈을 감았다.
시인은 레일이 끝나는 목포역 이정표에서 무한 허무감을 가졌다. 시인은 항구의 목포에서 강의를 하는 것에 만족 해 하였다. 술잔을 기우리다가도 연안부두로 나간다. 홍도와 압해도를 오가는 연락선을 보는 것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오가는 배들은 희망을 향하여 뱃고동을 울린다.
<저작권자 ⓒ 성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